힐링캠프를 보는데 김창완 아저씨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미래를 걱정하며 힘든 사춘기를 보내는 청소년들 에게는 “인생에 과녁을 함부로 걸지 마라. 지금은 꿈을 다 이루었다고 하기에도 어린 나이이고 아직은 쏴야될 화살이 많다. 과녁이 아직 어디있는지도 잘 모르지 않느냐. 주변에서 만들어주는 틀에 얽메이지 마라.” 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젊은 시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매일 술만 마시던 때를 이야기 해주며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때는 나를 갉아먹는 시간이었는데… 사실은 세상을 원망하죠. 세상을 원망하는 것보다 더 심한 건 자기 학대예요. 자기 모멸감에 빠지고 그러다 보니 술에 빠지게 되고. 그런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정말 힘들어요.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것 만큼 힘든 일은 없거든요. 근데 그런 과정에서조차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일이 일어나요. 이렇게 한 생명이 한 생명을 무시해도 되는가 하는 자각이 일어나요. 그러면 그 생명이 자각을 합니다. 그렇게해서 진짜 기어나왔어요. 차곡차곡 딛고 일어나서 조그만 것이라도 잡게 되면 그게 동아줄이 되요. 그 동아줄을 잡고 일어나는거죠. 처음에 큰 꿈을 이루려고 하면 잘 안될거예요. 그저 자기 일상으로부터 탈출, 거기에서 잡히는 희망. 이런게 중요한거죠.

  철학자 강신주도 말했다. 나중에는 도망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비겁해서 분노를 하게 된다고.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구나 싶다. 좌절감에 묻혀 갉아먹든, 목표에 눈이 멀어 갉아먹든 스스로를 좀먹는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자기를 직면하게 되고, 직면한 후 스스로를 구하게 되나보다. 젊음, 청춘을 떠나 성장이라는 것 자체는 늘 이렇게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다 내어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 취미에 빠져있다. 관련 책까지 찾아 읽어가며 사뭇 진지하게 실력을 키워나가려는 중이다. 습작들은 모두 인스타그램과 텀블러에 올리는데 그림을 업으로 삼은 지인이 본인 기분 내킬 때 댓글로 비평과 조언을 해준다. 그 친구는 내 그림을 보며 잘한 것은 무엇이며, 이러이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이렇게도 해보아라 하고 어쩐지 진지하게 첨삭을 해주는데, 이는 정말 어떠한 책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녀석이 관심이 있건 없건 간에 꾸준히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내 그림 포스트 밑에 달아 둔 조언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취미생활에서 나타나는 내 단점이 내 본업(연구 및 개발) 에서 맞딱드리는 문제점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요약하자면 겁을 낸다는 것과 인내심 (혹은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구와 개발을 할 때에도 연구 결과가 뜻대로 나오지 않을까 겁이 나 쉽게 시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차에 메인으로 잡고 있던 주제가 두 개 정도 유행이 지나버렸다. 이렇게 몇 년 지나고 나니 결국 깊이와 경험이 빈약한 연구자가 된 것이다. 꼴에 욕심은 또 많아 무언가를 시작하면 내 이상 속의 완성도에 한참 못미치는 중간 결과물에 실망해 쉽게 의욕이 떨어진다. 그리고는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취미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선을 잘못 그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짧은 선을 수 번 덧대며 이어나간다거나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채 그어나갔고, 그림을 그려나가다가도 중간 즈음의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역시나 집중도가 떨어져 정작 중요한 부분이나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을 더 대충 그리기까지하며 마무리 지어버리는 것이다. 

 

  이걸 처음 알아차렸을 때에는 충격이 상당했다.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고 실망했다. 온전히 내가 좋아 시작한 취미생활인데 이런 태도로 임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었다. 일년 전에 몰두했던 취미생활인 기타에까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생각은 겉잡을 수 없이 어둡게 퍼져나갔다. 늘 휴대하던 그림 그리는 도구를 휴대하는 파우치는 연구실 책상 한 켠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2주 정도 달고 다니던 과도한 자기 비판에 기인한 우울감은 아주 간단한 계기로 떨어져 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그리고 싶은 것이 생겼던 것이다. 한 미국 시트콤에 나오는 반사회적이고 외골수인 캐릭터였는데 시트콤을 보는 내내 표정이나 성격이 너무 인상 깊어서 인물은 특히 못그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연구실 한 켠에 있던 연필과 드로잉 노트를 집어들고는 어떻게 하면 더 그 캐릭터의 모습을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려나갔다. 결과물은 역시나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리는 내내 즐거웠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무런 다른 고민이 없었다. ‘어떻게 그리지’ 그 생각 하나만 머리에 가득했다. 그림이 끝날 때까지 나의 못난 점에 대한 책망과 예전에 그만 둔 취미들, 하다 만 연구들은 머릿속에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림 하나를 마무리 하자 내가 어떤 걸 못하는지가 보였고 어떤 걸 연습해야 하는 지도 명확하게 보였다. 행동에 옮긴 것이 실패라는 결과를 내었고, 결과를 분석하자 재도전을 향한 의지가 샘솟았다. 한 장의 그림 끝에 얻은 교훈은 내 본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취미로 좌절했던 의욕들이 취미로 인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법한 선순환을 체감하고 나니 책에서 읽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행동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 그 뒤는 그 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내 본업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 역시 든다. 다시 한 번 취미를 가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지성인들이 여행을 추천한다. 책에서는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값진 직접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담' 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알지 못했던 상황과 마주하며 얻을 경험과 이에 대한 설렘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경비는 얼마나 들지부터가 머릿속을 휘저으며 뿌옇게 눈을 흐린다.  

그래서 나는 어딘가를 내가 주체적으로 여행 다닌 기억이 거의 없다.  

어렸을 적엔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녔고, 학부생일때에는 휴학 중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좌절되었다.  

대학원에 들어와서야 학회 덕분에 그나마 여기저기를 다녔는데 그건 역시 여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니 포함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여행에 대한 부담감은 큰데, 얼마 전 제주 여행 중 짝꿍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왜 이렇게 여행에 부담을 느끼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짝꿍과 했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유럽인들의 여행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달이라는 기간동안 숙소를 한두군데 정해두고 쉬면서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짝꿍과 제주도 여행을 다니며 무리하게 다니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자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전투적으로 여행하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유럽인들의 여행 방식을 거론하게 된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여행이라는 게 휴식을 위한 것인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할 때엔 빈틈없고 치밀하게 시간을 쪼개서 계획을 잡고 목표를 수행하려다 보니 나중엔 오히려 여행 자체가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렴 휴가 가기가 싫다는 사람까지 있을까. 

이런 경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떠올리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름아닌 근무시간이다. 휴가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짧기만 하다. 실제로 정량적인 수치가 궁금해 우리나라 근로자의 근무시간 및 평균 휴가일수를 조사해보니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근무시간의 경우 OECD 국가의 평균 근무시간보다 연 630시간이 더 길며, 유급휴가 일수는 작년 기준으로는 10일에 그쳤다. 그마저도 7일이나 쓰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상 조사국 중 최하위로 근무시간까지 대비해서 본다면 참담하기까지 하다. (http://magazine.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1004&nkey=2013122000942000481&mode=sub_view) 이렇게 힘들게 낸 시간이니만큼 휴가를 잘 써야한다는 각오는 커지기 마련이고 잘 써야된다는 생각에 일정을 무리하게 잡아 최대한 하나라도 더 구경하거나 맛보려는 것이겠다. 이러니 여행이 휴식이 아니라 연례행사가 되는 수 밖에.

 

어르신들은 예전보다는 그래도 훨씬 나아졌다고 말한다. 흔히 ‘우리때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데, 예전과는 근로자들의 업무행태가 다르다. 가치 창출을 하는 산업군이 다르다. 단순히 시간을 많이 들여서 하는 일은 이미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에서 벗어난지가 한참이다. 당시의 제도를 여기에 갖다 대기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르다. 현 정부가 좋아하는 키워드인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건 이제 두말하면 입아픈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는 ‘휴식’에 인색하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이제는 스마트폰 위로 손가락만 조금 움직이면 세계의 소식을 알 수 있고, 지금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직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져 있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왜 놀면 안되냐는 제니퍼 소프트 같은 회사도 있고 빡세기로 소문난 대기업에서도 자율 출근을 시행한다. 더디고 더뎌 내 생에 누릴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있음에 희망을 걸어본다.



 

 

 

어느 주말 아침, 대충 끼니를 때우기 위해 씻지도 않은 채 슈퍼에 갔다. 한창 라면을 고르고 계산대로 가려는데 누군가가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가 어디.... %!^&*! "

 

 묘한 시선이 신경쓰여 가만히 집중해 뭐라고 하는지 다시 들어봤다.

 

"신라면이 어디있지...? 신라면이 어떤거지...?"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민소매 차림에 깡마르고 개구지게 생긴 대여섯살쯤 된 남자아이가 신라면을 코 앞에 두고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몇 번이고 그렇게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신라면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왔는데 '辛라면' 이라고 적혀있어 몰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개구진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귀여워서 '辛라면'을 가리키며 이게 신라면이라 알려주었다. 착한 일을 했다는 기쁨에 돌아서려는 찰나, 아이가 또 중얼거렸다.

 

"국수는 어디있지...?"

 

'아니 이 집은 면에 면을 반찬으로 드시기라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꼬마에게 다시 돌아서서 빨간 그물 조끼를 입고 계신 아주머니를 가리키며,

 

"모르는 물건이 있으면 저 아주머니께 가서 물어보면 돼. 창피한 일이 아니야."

 

라고 일러주었다. 꼬마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거두고는 활짝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선 열심히 무를 정리하고 계신 빨간 그물 조끼 아주머니께 쪼르르 걸어갔다. 첫 슈퍼 심부름, 얼마나 막막했을까. 나의 첫 심부름이 무엇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염없이 높았던 진열대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금은 귀찮기만 한 별 것 아닌 일이 그때는 하나의 원정이었다.

 

 얼마 전 그렇게나 겁내던 운전을 조금 해보고는 

 

'아, 이거 연습하지 않으면 운전 실력이 늘어날 턱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여러모로 필요를 느껴 차를 구입했다. 발발 떨며 코 앞에나 몇 번 왔다갔다 한지 무려 '이틀 째'. 집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다가 우측의 전봇대에 오른쪽 측면을 찧어버렸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차를 가진지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차에서 들려선 안될 것 같은 이질적인 마찰음과 기묘하고 작은 흔들림이 섬짓하게 날을 세워 심장까지 와 닿았다.

 

 정말 과장 티끌만큼도 보탬 없이 모의고사에서 OMR카드를 밀려쓴 걸 알아차렸을 때만큼 충격이 컸다. 우선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서는 인터넷으로 미친듯이 검색해보고 동호회도 검색해보고 아버지께 전화해 여쭤보고 사진도 보내드리고 동호회에 사진을 올려 견적도 물어보고...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사태파악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차를 구매했던 세일즈맨에게 연락이 닿아 덴트 업체를 소개받았고 현금 15만원에 흔적조차 없이 복구했다. 

 

무언가를 '처음'으로 겪어보는 것이 오랜만이어서인지 차를 원상복구시킬 때까지 온 신경이 차에만 쏠려있었다. 아버지께 

 

'처음이라 별 일이 다 별일입니다.'

 

푸념하자 '익숙한 것들을 신경쓰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 하나 하나 다 신경쓰고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적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신경쓸 일이 줄어드는 것인줄 알았다.

많은 것들을 알게되어 무엇이 닥치든 다 별 일이 아니게 되고 그래서 신경쓸 일이 줄어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경쓰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더라.

어쩌면 그래서 어른들은 그렇게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입가가 완고해지고, 머리가 빠지나보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읽었다. 바로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인데 영국의 미술, 건축 평론가인 '존 러스킨'을 인용했다. 존 러스킨은 여행지에서 느낀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데생'을 이야기 한다. 단순히 대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다시 재창조하기 위한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바로 '관찰'이다. 대상을 느낀대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관찰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부가적으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정리된다는 장점이 있다. 이 글에서 사진에 대한 견해는 나와 다르지만 그림에 대한 부분은 크게 공감이 된다.

  작년부터 그림을 본격적인 취미로 삼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의 출발점은 선긋기도 아니고 모작도 아니다. 바로 관찰에서 시작한다. 드로잉 입문과 관련된 서적들을 보면 항상 대상을 관찰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잘 그릴 필요는 없으니 되도록 관찰한 것들을 다 표현해내는 것을 그 다음 과제로 제시한다. 이후에는 인상 깊은 부분을 강조하는 것인데, 인상깊은 드로잉들은 바로 이것에서 차이가 난다. 내 수준이 여기까지만 되어도 사실 나는 소원이 없을 듯 한데, 역시나 이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면서 좋은 점은 예전의 호기심을 담아 사물을 보던 습관을 조금이나마 다시 찾았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나, 어머니께서 무언가 궁금하셔서 나에게 물어보셨는데 나는 안궁금해, 몰라, 라고 대합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호기심도 많고 궁금한 건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는데 변했다 말씀하셨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비슷한 말을 들어 나에게는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되었다. 호기심이 없는 연구원.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젠데, 어떤 현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면 어떠한 솔루션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 호기심 어린 시선이 돌아왔다. 저거 그려보고 싶은데, 어떻게 그려야 하지,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하지 로 시작한 질문들은 대상을 더욱 면밀하게 관찰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림 그리기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손을 많이 쓰게 된다는 점인데, 나는 컴퓨터로 대부분 작업하는 터라 직접 손으로 끄적일 일이 별로 없었다. 손을 많이 쓰면 두뇌 자극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데, 손을 자주 쓰게 되면서 손으로 무엇인가를 끄적여 나가는 것에 대한 귀찮음이 없어졌고, 나아가 메모하는 습관과 연구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도식홯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단순한 동경에서 시작한 그림이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과 계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취미로 권장한다. 연구실에 갖힌 채 단조로운 일상에 활력소가 되어주는 것은 물론, 익숙한 사물들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연습에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취미는 이렇듯 스스로의 발전에 이바지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취미를 여유가 있을 때나 신경을 쏟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독서와 마찬가지로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시간을 떼어 취미를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두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업에서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고 나아가 삶의 카테고리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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