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학생 식당에서 혼자 먹고 저녁도 집에서 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먹었더니 속이 영 불편했다. 주말에도 멀리 나가지 않은 탓에 활동량이 적어 소화가 안되는 모양이다.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후리스를 걸치고 비니를 쓴 채 플립플랍에 발가락을 끼우고 걸어나왔다.
오전엔 회의가 있었고 논문에 추가할 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논문 서너개를 살피다가 그 곳에서도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덮었다. 문득 연구주제를 너무 광범위하게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인쇄해둔 논문들을 정리해서 버렸다. 다 읽지도 못하리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건 어렵다. 서른의 나는 게으른 사람이고 핑계를 만들어 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며 원리를 응용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딘 탓에 연구를 깊이 있게 파지 못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까지는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몇 가지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도 어느정도 공부한 뒤 타인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공대생 답지않은 디자인 쪽 감각과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거부감이 없다. 영어로 작문 하는 것도 테크니컬 라이팅이면 그리 나쁘진 않은 편이다.
다 잘 할 수는 없다.
하나만 잘 하기도 사실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잘 한다는 기준을 높이고 높여서 스스로를 스테이트 오브 아트에 올리는 것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무튼,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내 장단점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고 단점을 고쳐나갈 환경이 주어져있다.
조바심이 사우나 문을 열었을 때 얼굴에 덥치는 증기마냥 달려들었던 오늘.
학교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았더니 트름이 끅끅 나온다.
괜찮다, 괜찮다.

평화로운 주말이다. 그루와 태봉이는 털을 고르고 있고 나는 아이패드로 즐겨찾는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을 읽고 있다.
문구에 대한 글을 읽다가 라미 2000 (내 위시 펜) 과 관련된 글을 보았다.
반사적으로 제목을 보자마자 클릭했는데 내용은 황당했다.

자기는 캡으로 된 펜과 스크류로 된 펜을 같이 들고다니지 않는데 새로 영입한 만년필 덕 (스크류 방식의) 에
라미 2000을 들고다니기가 애매해졌다는 것이다.

정말 사소한 것으로 장황하게도 썼다 싶다가, 원래 그렇게 쓰고 싶은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
글쓰기의 목적이자 즐거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는 글쓰기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요즘이다.
글을 쓸 생각은 하지 않고 글쓰기 좋은 맥 어플이나 키보드, 필기구, 노트 등을 알아보기 일쑤고, 정작 글을 잘 쓰기 위한 훈련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라미 2000을 들고다니기 힘들어 졌다는 그 블로거는 내가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고 배웠어야 할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마음껏 하고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드로잉 수업

저자
버트 도드슨 지음
출판사
미디어샘 | 2012-07-18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20년간 전세계에서 사랑 받아온 드로잉 책 한국어판 정식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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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그림을 끄적거리다가 뭔가 턱턱 막혀서
언제고 한 번은 드로잉과 관련된 책을 읽어봐야지 싶었다.
그러다가 학교 도서관에 드로잉과 관련된 책이 어떤게 있나 보다가
e-book 이 대여 가능했던 버트 도드슨의 드로잉 수업 을 발견했다.

몇 페이지 넘겨보다가 생각보다 체계적인 것 같아서 빌려 읽었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그림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태도에 대한 조언이기도 해서
읽어내려가는 재미가 있었다.
예전에 글쓰기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분야에서 대가가 되면 그렇게 접근하게 되나보다.

‘드로잉은 본질적으로 엄격한 공식의 적용이라기보단 단지 ‘보는과정’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눈을 믿는 것과 더불어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이 과학적인 것이든 시각적인 것이든 간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이,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설득력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드로잉이란, 대상을 보고 윤곽이나 형태에 주목한 뒤 마음속에 그것을 담아두었다가 잊어버리기 전에 그리는 것’
‘괴롭다고 시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겨우 깨달았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별난 아이디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 몸이 별난 단백질을 싫어해서 같은 양의 에너지를 써가며 저항하는 것과 같다. 솔직히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기 전에 스스로 끊임없이 논쟁을 하지 않는가. - 윌프레드 트로터’
‘상상을 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은 필요없습니다. 누구나 같은 방식으로 상상을 합니다. 절대 스스로 상상력이 빈곤하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상상력이란 가끔 별난 아이디어를 즐기는 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창조란, 직전의 행위에 의존하고 다음의 행위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 에드윈 랜드’

예술 뿐만아니라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인생 선배의 드로잉 수업. 좋다. 드로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한 번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7-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금, 당신은 어느 역에 서 있습니까? 출간 7일 만에 10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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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은 1Q84를 읽고난 뒤에 한동안 읽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조미료같은 할아버지. 맛나게 잘 쓰는 건 감히 내가 평가할 수준이 아니지만,
뭔가 내게는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이 책은 생일 선물로 받아서는 이제야 펼쳐보았는데, 3일만엔가 시간을 쪼개어 다 읽어내려갔다.
세미나 준비를 해야함에도 하루키의 책을 한참 읽어내려갔다.
다 읽고 난 뒤 마음 속 어딘가가 간질간질 해서 얼마전에 산 하얀 컨버스로 갈아신은 뒤 운동장으로 향했다.
점심도 맥도날드에서 배달시켜 먹은 터라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도 크게 한 몫을 했다.
기온은 따뜻하지만 하늘이 적당히 흐려서 볕이 강하지도 않았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짧은 산책이니만큼 한걸음 한걸음 꼭꼭 씹어가며 걸었다.
운동장에서 전력을 다해 축구를 하는 학생들을 보며 걷다가 문득 학교는 그래도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사분의 일쯤 걸었을 때 문득 이틀 전 전자도서로 대출한 드로잉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잠깐 훑어보느라 몇 페이지 읽었는데,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의 자세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요지는 그림을 그릴 때 부정적인 피드백을 스스로에게 보내며 그릴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피드백을 보내며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단 드로잉 뿐만이 아니라 연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하는 주제나 상황에 대해 생산적인 대화를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는다면 그 대학원 생활은 지옥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떻게든 박사는 딸 수 있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어떻게 따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박사과정은 비단 연구나 프로젝트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이런 과정을 겪어보는 것 자체도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 잘 이겨내보자 했다.
운동장을 다 돌아갈 때 즈음,
책을 읽고 간질간질했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았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괜찮다 괜찮다 하고 잔잔하게 나를 위로해 주었다. ‘순례의 해’라는 좋은 음악과 함께.



  • 하루키가 여자를 묘사할 때는 특유의 집요함과 디테일함이 더 잘 드러난다. 첫인상과 옷차림, 목소리, 복장, 악세사리를 토대로 그 인물의 성격 및 성장과정은 물론이고 (결정적으로) 잠자리에서 어떤 모습일지 까지 풀어 상상하는 장면을 볼 때면 내가 남자라 다행이다 싶다. (어차피 하루키 할아버지를 대면할 일은 없겠지만)
  • 이름이 가진 무게에 대해 언급이 된 부분이 있다. 애초에 제목부터도 이름에 색깔과 관련된 한문이 들어가지 않아서 ‘색채가 없는’으로 시작하니 말 다했지만. 나 역시 언제고 나는 내 이름대로 살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본 적이 있다. 대답은 주로 ‘열심히 하자’로 그쳤다. 이름에 의해서 그 사람의 그릇이 결정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름의 무게가 삶의 무게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삶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있을 때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내 이름대로 살고 있는가, 이름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 볼 수 있는가.
  • 소위 말하는 ‘좋은 책’이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라고들 한다. 하루키의 책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끔 하는 힘이 분명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딱 ‘생각’이라는 걸 스트레스 받지 않는 선까지만 하게끔 한다. 그래서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영화 ‘설국열차’ 처럼 말이다.





7년의 밤

저자
정유정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11-04-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세계문학상 수상 작가 정유정의 신작 장편.7년의 밤 동안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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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묘사가 인상 깊었던 책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게 교훈이나 생각할 거리는 없었다.

오락 소설이라는게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싶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흡인력 만큼은 탁월하다. 인물의 심리 묘사와 흐름 조절은 정말 일품이다.

푹 빠져들어서 나의 책 읽는 속도가 더 빨랐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

영화화 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댈세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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