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핑턴포스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글(http://www.huffingtonpost.kr/owen-joe/story_b_6008202.html?utm_hp_ref=korea)이 올라와 읽는데 재미있는 표현이 있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읽는 이에게 ‘취향’이 생기게끔 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이 ‘취향’을 ‘체험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 음악, 음식, 라이프 스타일, 패션에 걸쳐 이루어지는 하루키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그 취향을 공유하고 싶게 만든다. 당장에 나부터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에는 소개되는 음악을 옮겨 적거나 심지어 틀어놓고 읽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대학에 진학하고 의복과 생활에 자유가 본격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주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스타일 (취향)이 명확한 사람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유행에 따라 옷을 잘 입는 친구들 보다는 어디서 저런 옷을 구해서 어떻게 저렇게 입을 생각을 했을까, 싶게 만드는 친구들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갈색 티셔츠를 둘둘 말아 두건처럼 쓰고 다녔던 친구나, 가수 비가 방송에 입고 나오기도 전에 맨몸에 자켓을 걸치고 스카프를 한 친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라이프 스타일 자체를 동경했던 사람도 한 명 있었는데, 학부 4학년 즈음 같이 살았던 룸메이트 형이 그랬다. 약간은 촌스럽게 생긴 이목구비였지만 큰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마른 몸은 검정색 티셔츠와 청바지가 멋지게 어울렸고, 자기 전에는 항상 재즈를 틀어놓고 검정색의 동그란 금속테 안경을 끼고는 침대맡에서 책을 읽었다. 그 형에 비하면 비주얼은 한참 동떨어지지만 기숙사에서 나와 자취방을 가졌을 때, 자기 전 책을 읽어보겠답시고 스탠드를 머리맡으로 옮겨두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비주얼 뿐만아니라 독서량과 수준도 아직까지 그 형과 한참 거리가 있다 싶다.

 

내가 재즈를 하루키의 책을 통해 소개 받았고, 자기 전 책을 읽는 라이프 스타일은 예전 룸메이트 형을 따라했듯이 취향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공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공유된 취향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기까지는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막연한 동경과 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한 ‘취향’은 자신 속에서 몇번이고 소화시키고 양분으로 삼으며 살을 붙여나가 보아야 진정한 의미의 ‘취향’이 된다. 물론 새로운 취향이 몸에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차피 배가 고플테니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정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취향을 찾는다면 왜 이 맛있는 걸 이제서야 먹기 시작했지 싶을 것이다. 나 역시 조금 더 자유로운 시간이 많았을 때 다양한 취향들을 음미해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동경했던 사람들처럼 내 취향도 내 맛이 깃들어 더 멋졌을텐데 말이다.

 

얼마전 면접차 올라온 동생에게 최근에 가장 자주 썼던 만년필을 선물해주었다. 써보고 싶지만 만년필에 들이는 시간이 낭비일 것 같다던 동생의 말에 보란듯이 카트리지를 끼워주었다. 면접이 끝나고 집에 내려간 날 동생에게 카톡 하나가 왔다. 손에 땀이 많아 만년필로 쓴 글자들이 번진다는 것이다. 나는 냉큼 유투브에서 만년필로 글씨를 쓰는 영상 하나를 찾아 동생에게 보내주었다. 그 이후로 써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별 말이 없다. 동생에게 만년필이 잘 맞아서 멋들어진 취향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취향’이라는 건 확실히 전파의 욕구도 불러 일으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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