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다 내어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 취미에 빠져있다. 관련 책까지 찾아 읽어가며 사뭇 진지하게 실력을 키워나가려는 중이다. 습작들은 모두 인스타그램과 텀블러에 올리는데 그림을 업으로 삼은 지인이 본인 기분 내킬 때 댓글로 비평과 조언을 해준다. 그 친구는 내 그림을 보며 잘한 것은 무엇이며, 이러이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이렇게도 해보아라 하고 어쩐지 진지하게 첨삭을 해주는데, 이는 정말 어떠한 책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녀석이 관심이 있건 없건 간에 꾸준히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내 그림 포스트 밑에 달아 둔 조언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취미생활에서 나타나는 내 단점이 내 본업(연구 및 개발) 에서 맞딱드리는 문제점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요약하자면 겁을 낸다는 것과 인내심 (혹은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구와 개발을 할 때에도 연구 결과가 뜻대로 나오지 않을까 겁이 나 쉽게 시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차에 메인으로 잡고 있던 주제가 두 개 정도 유행이 지나버렸다. 이렇게 몇 년 지나고 나니 결국 깊이와 경험이 빈약한 연구자가 된 것이다. 꼴에 욕심은 또 많아 무언가를 시작하면 내 이상 속의 완성도에 한참 못미치는 중간 결과물에 실망해 쉽게 의욕이 떨어진다. 그리고는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취미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선을 잘못 그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짧은 선을 수 번 덧대며 이어나간다거나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채 그어나갔고, 그림을 그려나가다가도 중간 즈음의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역시나 집중도가 떨어져 정작 중요한 부분이나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을 더 대충 그리기까지하며 마무리 지어버리는 것이다. 

 

  이걸 처음 알아차렸을 때에는 충격이 상당했다.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고 실망했다. 온전히 내가 좋아 시작한 취미생활인데 이런 태도로 임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었다. 일년 전에 몰두했던 취미생활인 기타에까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생각은 겉잡을 수 없이 어둡게 퍼져나갔다. 늘 휴대하던 그림 그리는 도구를 휴대하는 파우치는 연구실 책상 한 켠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2주 정도 달고 다니던 과도한 자기 비판에 기인한 우울감은 아주 간단한 계기로 떨어져 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그리고 싶은 것이 생겼던 것이다. 한 미국 시트콤에 나오는 반사회적이고 외골수인 캐릭터였는데 시트콤을 보는 내내 표정이나 성격이 너무 인상 깊어서 인물은 특히 못그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연구실 한 켠에 있던 연필과 드로잉 노트를 집어들고는 어떻게 하면 더 그 캐릭터의 모습을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려나갔다. 결과물은 역시나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리는 내내 즐거웠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무런 다른 고민이 없었다. ‘어떻게 그리지’ 그 생각 하나만 머리에 가득했다. 그림이 끝날 때까지 나의 못난 점에 대한 책망과 예전에 그만 둔 취미들, 하다 만 연구들은 머릿속에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림 하나를 마무리 하자 내가 어떤 걸 못하는지가 보였고 어떤 걸 연습해야 하는 지도 명확하게 보였다. 행동에 옮긴 것이 실패라는 결과를 내었고, 결과를 분석하자 재도전을 향한 의지가 샘솟았다. 한 장의 그림 끝에 얻은 교훈은 내 본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취미로 좌절했던 의욕들이 취미로 인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법한 선순환을 체감하고 나니 책에서 읽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행동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 그 뒤는 그 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내 본업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 역시 든다. 다시 한 번 취미를 가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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