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아침, 대충 끼니를 때우기 위해 씻지도 않은 채 슈퍼에 갔다. 한창 라면을 고르고 계산대로 가려는데 누군가가 쳐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가 어디.... %!^&*! "

 

 묘한 시선이 신경쓰여 가만히 집중해 뭐라고 하는지 다시 들어봤다.

 

"신라면이 어디있지...? 신라면이 어떤거지...?"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민소매 차림에 깡마르고 개구지게 생긴 대여섯살쯤 된 남자아이가 신라면을 코 앞에 두고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몇 번이고 그렇게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신라면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왔는데 '辛라면' 이라고 적혀있어 몰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개구진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게 귀여워서 '辛라면'을 가리키며 이게 신라면이라 알려주었다. 착한 일을 했다는 기쁨에 돌아서려는 찰나, 아이가 또 중얼거렸다.

 

"국수는 어디있지...?"

 

'아니 이 집은 면에 면을 반찬으로 드시기라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꼬마에게 다시 돌아서서 빨간 그물 조끼를 입고 계신 아주머니를 가리키며,

 

"모르는 물건이 있으면 저 아주머니께 가서 물어보면 돼. 창피한 일이 아니야."

 

라고 일러주었다. 꼬마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거두고는 활짝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선 열심히 무를 정리하고 계신 빨간 그물 조끼 아주머니께 쪼르르 걸어갔다. 첫 슈퍼 심부름, 얼마나 막막했을까. 나의 첫 심부름이 무엇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염없이 높았던 진열대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금은 귀찮기만 한 별 것 아닌 일이 그때는 하나의 원정이었다.

 

 얼마 전 그렇게나 겁내던 운전을 조금 해보고는 

 

'아, 이거 연습하지 않으면 운전 실력이 늘어날 턱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여러모로 필요를 느껴 차를 구입했다. 발발 떨며 코 앞에나 몇 번 왔다갔다 한지 무려 '이틀 째'. 집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다가 우측의 전봇대에 오른쪽 측면을 찧어버렸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차를 가진지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차에서 들려선 안될 것 같은 이질적인 마찰음과 기묘하고 작은 흔들림이 섬짓하게 날을 세워 심장까지 와 닿았다.

 

 정말 과장 티끌만큼도 보탬 없이 모의고사에서 OMR카드를 밀려쓴 걸 알아차렸을 때만큼 충격이 컸다. 우선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서는 인터넷으로 미친듯이 검색해보고 동호회도 검색해보고 아버지께 전화해 여쭤보고 사진도 보내드리고 동호회에 사진을 올려 견적도 물어보고...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사태파악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차를 구매했던 세일즈맨에게 연락이 닿아 덴트 업체를 소개받았고 현금 15만원에 흔적조차 없이 복구했다. 

 

무언가를 '처음'으로 겪어보는 것이 오랜만이어서인지 차를 원상복구시킬 때까지 온 신경이 차에만 쏠려있었다. 아버지께 

 

'처음이라 별 일이 다 별일입니다.'

 

푸념하자 '익숙한 것들을 신경쓰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 하나 하나 다 신경쓰고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적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신경쓸 일이 줄어드는 것인줄 알았다.

많은 것들을 알게되어 무엇이 닥치든 다 별 일이 아니게 되고 그래서 신경쓸 일이 줄어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경쓰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더라.

어쩌면 그래서 어른들은 그렇게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입가가 완고해지고, 머리가 빠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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