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곳에 산지도 벌써 10년째에 접어든다. 고향을 떠나 대학을 다니기 위해 상경하여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지금까지.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음을 이 동네가 변한 모습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을 때에는 낡은 캐리어 하나가 손에 쥐어져 있었고, 대학이 결정된 후 서울은 춥다시며 부모님께서 사주신 카키색과 황토색 사이 어딘가의 두터운 무스탕 자켓에 밝은 갈색의 가는 골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멋을 부려보겠답시고 짧은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까지 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센스였는지. 서울의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르는 채 한양대 지하철 역에 내려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한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서울이 생각보다 인정 없는 곳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며 기숙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남자는 종교를 전도하려는 목적이 있긴 했지만 지하철 역에서 기숙사까지는 근 이십분은 걸어야 했으므로 참 친절한 사람이었구나 싶다. 

 

낡아보이는 기숙사에 들어서서 입사 과정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처음 열었던 기숙사의 방은 내가 태어나서 본 가장 작은 방이었다.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코 끝에 뭉근하게 들러붙었고, 푹 꺼진 침대 매트리스에는 이런 저런 얼룩이 실내가 어두침침한 와중에도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더 보기 싫은 방을 빠져나와 주변에 어떤 시설이 있나 돌아보러 나왔다. 오분도 채 걷지 않아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내가 생각해왔던 서울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동네로 진입하는 삼거리에 세워진 큰 바위에는 ‘사근동’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이 동네 이름 마저도 당황스러웠던 사근동과의 첫 만남이었다.

 

대학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쓰러질 듯한 미색의 건물들에 걸려있는 간판들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의 세트장 같았고, 건물 앞에 걸터 앉아있는 어르신들의 평균 연령은 거진 일흔을 훌쩍 넘어 보였다. 내 또래의 학생들은 어쩐 일인지 눈에 띄지 않았고 간혹 색 바랜 옷을 입은 꼬마들이 인근 초등학교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에서 둘 셋씩 뭉쳐 다니곤 했다. 그러니까 이 곳은 광안대교가 준공 들어가기도 전의 광안국민학교 — 내가 여덟살 때 잠깐 다녔던, 그러니까 22년 전 — 앞 같았다. 바다로 쭉 이어지는 평평한 길 대신 버스가 한참은 굉음을 내야 오를 수 있는 언덕베기가 있다는 점만 빼면 동네가 풍기는 분위기는 똑같았다. 새로운 나의 삶의 터전은 그렇게 내 유년시절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며 적잖은 실망감을 주었다.

 

십년이라는 시간동안 사근동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위험했던 사근고갯길은 이제 밝은 가로등이 규칙적으로 심어져 있고, 비포장 길이나 다름 없던 고갯길은 몇 번의 대공사 끝에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도포되었다. 제대로 된 편의점 하나 없던 이 곳에 지금은 편의점은 물론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도 두 곳이나 생겼다. 등교를 위해 스쳐지나갔던 학생들이 그 카페를 방문하기 위해 이 동네를 찾아오기까지 했고, 인근에 거주하던 학생들도 왕십리까지 굳이 나갈 필요 없이 이 곳에서 만남을 가진다. 덕분에 사근동을 오가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시원찮은 것 같지만 칵테일을 파는 바도 생겼다. 대학교의 교환학생이나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숙소도 생기면서 보이기 시작한 이국적인 얼굴들은 이런 사근동의 변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다.

 

물론 사근동을 대하는 내 마음 역시 많이 변했다. 이는 달라진 동네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동네에 익숙해지고 편해지기 시작하면서 미처 몰랐던 장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십리까지 한 번에 — 지금은 압구정 까지도 — 갈 수 있는 버스도 있고, 지하철 2호선과 1호선을 이어주는 지하철 노선도 걸어서 오분 거리에 있다. 365일 할인을 한다는 동네 슈퍼와 물건의 종류는 적지만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도 있었고 약의 유통기한이 의심되긴 하지만 나름 약국도 있다. 동네의 대부분이 주택이다 보니 소란스럽지 않아서 — 공사할 때를 제외하면 — 아무런 방해없이 푹 쉴 수 있다. 학교가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거주하는 사람들도 정겨워졌다. 격주로 일요일에는 인근 어르신들께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무더운 날씨에 ATM 건물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수다를 떨고 계시는 할머니들을 처음 봤을 때에는 한참을 웃었다. 어떤 집 담벼락에는 누군가가 여름 내내 몰래 수박 껍질을 버렸는지 화가 잔뜩 난 주인 아주머니의 분노에 찬 경고장이 거칠게 찢겨진 피자 박스에 쓰여 있었다. “여기다 수박 껍질 버린 놈 설사나 해라.”

 

이 곳에는 서울 살이를 하며 느낄 수 없었던 사람 사는 내음이 가득했다. 이제는 고향보다 더 고향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내가 혼자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이 곳인 것이다. 얼른 졸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곳 역시 서둘러 떠나야 할 곳이 되긴 했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만큼 정을 붙이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데이트하러 나가던 길 무심코 누른 셔터에 담긴 사근동의 모습을 보고 상념에 잠겼다가 두서없이 써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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