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넌 한글로 쓰지 말고 영어로 써, 그게 훨씬 더 예뻐.”

 글씨체에 신경을 썼던 건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손으로 써가며 공부를 하는 편이다 보니 나름 손에 익은 글씨체가 있었던 데다가 남중, 남고라 내 글씨체는 그리 못난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전혀 의식할 일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글씨를 바꿀 수 있을지 고민을 하던 차에 ‘어떤’ 글씨체로 바꾸는 것이 좋을지부터 결정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체를 바꾸는 데에는 따라 쓰기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주변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찾다가 같이 학원에 다니는 친구 하나가 생각나 무작정 필기한 걸 빌려달라고 했다.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어느 정도 악필은 면할 수 있었다. 대학 진학 후에 여전히 내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만년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교정을 시도했지만, 꾸준히 정성을 들일 여유는 없어서 바꾸지는 못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바로 글자에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글자라도 쓸 때마다 모양이 제각각이라 다 써놓고 보면 괜히 지저분해 보여서 눈에 거슬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손으로 쓰는 일이 많아진 요즘 다시 한 번 글씨체를 바꾸어볼까 하는 생각에 이런저런 자료들을 읽어보다가 

“생각을 일구어주는 글씨체와 생각의 흐름을 막는 글씨체가 있다.”

라는 글을 보고 글 쓸 때 어땠는지 되돌아보았다.

분명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했던 글들은 컴퓨터로 옮겨 쓸 때 세부적인 내용이 듬성듬성 빠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글씨체가 괴발개발인 경우는 보통 내용의 흐름을 잊기 전에 휘갈겨 쓴 탓인지 옮겨 쓸 때 수정하는 양이 훨씬 적었다. 역시 외면 보다는 그 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최종 목표는 컴퓨터로 글을 써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니 글씨체 자체는 결국 염려할 바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번에도 글씨체를 고쳐보자는 다짐은 무위로 돌아간다. 하지만 마음속을 계속 간지럽히던 딱지 하나는 떼어낸 기분이다. 글씨체에 신경 쓸 시간에 내용에나 더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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