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와 대화하던 중 공격적인 말투로 의견을 펼치는 녀석 덕분에 나까지 대답을 공격적으로 했다. 평소 내 말투가 온화하다고 하시며 기술적 카리스마가 있으려면 공격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교수님께서 조언을 해주셨지만, 내가 청자가 되어보니 불필요하게 반감만 생길 뿐 그로 인해 내가 상대방의 의견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상대방에게 의견을 제시하거나 반박을 할 때에는 공격적인 말투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그런 언사를 받아들일 때에는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상대방이 왜 그렇게 공격성을 띤 어조로 이야기하는지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겠다.



언제고부터 이를 가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밤 가는 것은 아니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거나 피곤한 날 이따금씩 그러는 모양이다.

얼마 전 이가 썩어 치과에 들렀다. 썩은 부위가 넓어 결국 신경치료까지 진행하고 크라운 치료를 받았는데, 새로운 이를 해넣은 첫날 밤 잠이 들었다가 돌을 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원인은 새로운 이의 안쪽이 다른 이 보다 살짝 높아 이를 갈 때 아랫니에 걸려 이물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손으로는 거의 차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혀로는 엄청난 단차를 느꼈다. 이를 점검하러 치과에 들렀을 때 의사 선생님께 이런 상황을 모두 이야기 해드렸더니 이 높이를 조정해 주시고는 의외의 팁을 하나 알려주셨다.

잘 때 이를 가는 이유는  바로 일과 시간 동안 턱 근육이 계속 긴장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은 자기 전 턱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손가락 두 세 개를 이용하여 턱 근육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거나 타월을 따뜻하게 적셔서 가볍게 찜질을 해주면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셨다. 세상에 도대체 낮 동안 얼마맡큼의 스트레스를 받기에 근육이 그렇게까지 경직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가는 소리에 잠이 깰 정도로 갈아댔던 날도 기억이 난다. 요며칠의 스트레스 원인은 학기 평가를 앞둔 채 맞이하는 연구실 세미나 준비였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전달 역시 중요한 세미나는 한 학기에 한 번 정도로 순서가 돌아오니만큼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조금 많이 예민해졌었던 모양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 아닐까. 퇴근을 적당히 일찍 한 후, 그리고 주말을 이용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시간을 갖는 것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너무 고차원 적이다. 휴식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 그자체를 위한 것이다. 명심할 점은 최선을 다 했을 때에만 진정한 휴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힐링캠프를 보는데 김창완 아저씨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미래를 걱정하며 힘든 사춘기를 보내는 청소년들 에게는 “인생에 과녁을 함부로 걸지 마라. 지금은 꿈을 다 이루었다고 하기에도 어린 나이이고 아직은 쏴야될 화살이 많다. 과녁이 아직 어디있는지도 잘 모르지 않느냐. 주변에서 만들어주는 틀에 얽메이지 마라.” 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젊은 시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매일 술만 마시던 때를 이야기 해주며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때는 나를 갉아먹는 시간이었는데… 사실은 세상을 원망하죠. 세상을 원망하는 것보다 더 심한 건 자기 학대예요. 자기 모멸감에 빠지고 그러다 보니 술에 빠지게 되고. 그런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정말 힘들어요.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것 만큼 힘든 일은 없거든요. 근데 그런 과정에서조차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일이 일어나요. 이렇게 한 생명이 한 생명을 무시해도 되는가 하는 자각이 일어나요. 그러면 그 생명이 자각을 합니다. 그렇게해서 진짜 기어나왔어요. 차곡차곡 딛고 일어나서 조그만 것이라도 잡게 되면 그게 동아줄이 되요. 그 동아줄을 잡고 일어나는거죠. 처음에 큰 꿈을 이루려고 하면 잘 안될거예요. 그저 자기 일상으로부터 탈출, 거기에서 잡히는 희망. 이런게 중요한거죠.

  철학자 강신주도 말했다. 나중에는 도망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비겁해서 분노를 하게 된다고. 결국 스스로를 갉아먹는 시간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구나 싶다. 좌절감에 묻혀 갉아먹든, 목표에 눈이 멀어 갉아먹든 스스로를 좀먹는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자기를 직면하게 되고, 직면한 후 스스로를 구하게 되나보다. 젊음, 청춘을 떠나 성장이라는 것 자체는 늘 이렇게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다 내어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 취미에 빠져있다. 관련 책까지 찾아 읽어가며 사뭇 진지하게 실력을 키워나가려는 중이다. 습작들은 모두 인스타그램과 텀블러에 올리는데 그림을 업으로 삼은 지인이 본인 기분 내킬 때 댓글로 비평과 조언을 해준다. 그 친구는 내 그림을 보며 잘한 것은 무엇이며, 이러이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이렇게도 해보아라 하고 어쩐지 진지하게 첨삭을 해주는데, 이는 정말 어떠한 책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 녀석이 관심이 있건 없건 간에 꾸준히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내 그림 포스트 밑에 달아 둔 조언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취미생활에서 나타나는 내 단점이 내 본업(연구 및 개발) 에서 맞딱드리는 문제점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요약하자면 겁을 낸다는 것과 인내심 (혹은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구와 개발을 할 때에도 연구 결과가 뜻대로 나오지 않을까 겁이 나 쉽게 시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차에 메인으로 잡고 있던 주제가 두 개 정도 유행이 지나버렸다. 이렇게 몇 년 지나고 나니 결국 깊이와 경험이 빈약한 연구자가 된 것이다. 꼴에 욕심은 또 많아 무언가를 시작하면 내 이상 속의 완성도에 한참 못미치는 중간 결과물에 실망해 쉽게 의욕이 떨어진다. 그리고는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취미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선을 잘못 그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짧은 선을 수 번 덧대며 이어나간다거나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채 그어나갔고, 그림을 그려나가다가도 중간 즈음의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역시나 집중도가 떨어져 정작 중요한 부분이나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을 더 대충 그리기까지하며 마무리 지어버리는 것이다. 

 

  이걸 처음 알아차렸을 때에는 충격이 상당했다.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고 실망했다. 온전히 내가 좋아 시작한 취미생활인데 이런 태도로 임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었다. 일년 전에 몰두했던 취미생활인 기타에까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생각은 겉잡을 수 없이 어둡게 퍼져나갔다. 늘 휴대하던 그림 그리는 도구를 휴대하는 파우치는 연구실 책상 한 켠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2주 정도 달고 다니던 과도한 자기 비판에 기인한 우울감은 아주 간단한 계기로 떨어져 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그리고 싶은 것이 생겼던 것이다. 한 미국 시트콤에 나오는 반사회적이고 외골수인 캐릭터였는데 시트콤을 보는 내내 표정이나 성격이 너무 인상 깊어서 인물은 특히 못그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연구실 한 켠에 있던 연필과 드로잉 노트를 집어들고는 어떻게 하면 더 그 캐릭터의 모습을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려나갔다. 결과물은 역시나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리는 내내 즐거웠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아무런 다른 고민이 없었다. ‘어떻게 그리지’ 그 생각 하나만 머리에 가득했다. 그림이 끝날 때까지 나의 못난 점에 대한 책망과 예전에 그만 둔 취미들, 하다 만 연구들은 머릿속에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그림 하나를 마무리 하자 내가 어떤 걸 못하는지가 보였고 어떤 걸 연습해야 하는 지도 명확하게 보였다. 행동에 옮긴 것이 실패라는 결과를 내었고, 결과를 분석하자 재도전을 향한 의지가 샘솟았다. 한 장의 그림 끝에 얻은 교훈은 내 본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취미로 좌절했던 의욕들이 취미로 인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법한 선순환을 체감하고 나니 책에서 읽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행동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 그 뒤는 그 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내 본업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 역시 든다. 다시 한 번 취미를 가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지성인들이 여행을 추천한다. 책에서는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값진 직접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담' 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알지 못했던 상황과 마주하며 얻을 경험과 이에 대한 설렘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경비는 얼마나 들지부터가 머릿속을 휘저으며 뿌옇게 눈을 흐린다.  

그래서 나는 어딘가를 내가 주체적으로 여행 다닌 기억이 거의 없다.  

어렸을 적엔 부모님 손에 이끌려 다녔고, 학부생일때에는 휴학 중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좌절되었다.  

대학원에 들어와서야 학회 덕분에 그나마 여기저기를 다녔는데 그건 역시 여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니 포함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여행에 대한 부담감은 큰데, 얼마 전 제주 여행 중 짝꿍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왜 이렇게 여행에 부담을 느끼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짝꿍과 했던 이야기는 다름 아닌 유럽인들의 여행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달이라는 기간동안 숙소를 한두군데 정해두고 쉬면서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짝꿍과 제주도 여행을 다니며 무리하게 다니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자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전투적으로 여행하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유럽인들의 여행 방식을 거론하게 된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여행이라는 게 휴식을 위한 것인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할 때엔 빈틈없고 치밀하게 시간을 쪼개서 계획을 잡고 목표를 수행하려다 보니 나중엔 오히려 여행 자체가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렴 휴가 가기가 싫다는 사람까지 있을까. 

이런 경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떠올리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름아닌 근무시간이다. 휴가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짧기만 하다. 실제로 정량적인 수치가 궁금해 우리나라 근로자의 근무시간 및 평균 휴가일수를 조사해보니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근무시간의 경우 OECD 국가의 평균 근무시간보다 연 630시간이 더 길며, 유급휴가 일수는 작년 기준으로는 10일에 그쳤다. 그마저도 7일이나 쓰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상 조사국 중 최하위로 근무시간까지 대비해서 본다면 참담하기까지 하다. (http://magazine.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1004&nkey=2013122000942000481&mode=sub_view) 이렇게 힘들게 낸 시간이니만큼 휴가를 잘 써야한다는 각오는 커지기 마련이고 잘 써야된다는 생각에 일정을 무리하게 잡아 최대한 하나라도 더 구경하거나 맛보려는 것이겠다. 이러니 여행이 휴식이 아니라 연례행사가 되는 수 밖에.

 

어르신들은 예전보다는 그래도 훨씬 나아졌다고 말한다. 흔히 ‘우리때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데, 예전과는 근로자들의 업무행태가 다르다. 가치 창출을 하는 산업군이 다르다. 단순히 시간을 많이 들여서 하는 일은 이미 우리나라의 주력산업에서 벗어난지가 한참이다. 당시의 제도를 여기에 갖다 대기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르다. 현 정부가 좋아하는 키워드인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건 이제 두말하면 입아픈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는 ‘휴식’에 인색하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이제는 스마트폰 위로 손가락만 조금 움직이면 세계의 소식을 알 수 있고, 지금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직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져 있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왜 놀면 안되냐는 제니퍼 소프트 같은 회사도 있고 빡세기로 소문난 대기업에서도 자율 출근을 시행한다. 더디고 더뎌 내 생에 누릴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있음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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