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자, 고 새삼 다짐했다. 영화 ‘역린’에서 언급되어 유명세를 탔던 구절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코딩을 하다가 새삼 그 의의를 다시 마음에 새겼다. 예전에 무심코 짜두었던 코드가 오늘 내가 부딪혔던 난관 중 하나를 해결해 준 것이다. 내가 노력했던 것들은 크던 작던 언젠가 도움이 된다. 그러니 작은 일에도 노력과 정성을 게을리 하지 말자.

 

2.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의 가치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돈을 쓰는 편이 아닌 나에게는 주위의 다양한 유혹들로부터 잔고를 지켜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처음 그 물건을 샀을 때의 가치와 감흥을 다시 떠올려 보자. 기타, DLSR과 렌즈들, 타블렛, 노트, 잉크, 만년필 등 모두. 지름신이 강하게 한 번 왔다 가서 그런지 현자타임도 오래 가나보다.



보통의 젊은 남자의 모습은 이렇다.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최신 유행에 맞추어 옷도 신발도 사 입고, 헤어스타일도 과감하게 해보고 친구들을 모아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우고...

그러던 젊은 남자는 어느 순간 '아저씨가 된다. 점점 자기가 즐겼던 것들과 멀어지는 때가 온다.

사진이나 음악, 게임 등에 쓰는 시간은 눈에 띠게 줄어들고, 옷도 과하게 지저분해 보이지만 않으면 가지고 있던 옷들로 대충 돌려 입는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크게 줄어든다. 

청년이 아저씨로 변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 자신에게 쏟았던 정성은 온전히 그 대상을 향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든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을 때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래, 하루키가 말한 '여자 없는 남자들'의 세계에 다녀온 청년은 그래서 아저씨가 된다.

아저씨가 되어간다는 건 사회적 통념처럼 마냥 입에 쓰기만한 것은 아니다. 잃기 전 대상의 소중함을 적확하게 안다는 것은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대상을 잃은 후 몰려오는 후회와 비탄을 통해 그 의미를 깨닫는다. 상실 후에 깨닫는 소중함은 대상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의 늪으로 사람을 끌어 내리고 미련이라는 끔찍한 이름의 멍에를 씌우기도 한다. 

아저씨가 된 남자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것을 잃고 난 후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현재를 조금 미뤄둔다. 기꺼이 자신의 살을 떼어주고 상대방을 살찌우며 포만감을 느낀다. 결국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되었던 청년이 아저씨가 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가요 중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라는 노래의 가사 중엔 이런 것도 있다. 

'한번쯤은 시련에 울었었던 눈이 고운 사람 품에 안겨서' 

연애를 함으로써 한 사람이 완성된다는 우리 교수님의 지론은 마냥 우스개 소리는 아닌가보다.



 

 

 

 내가 이 곳에 산지도 벌써 10년째에 접어든다. 고향을 떠나 대학을 다니기 위해 상경하여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지금까지.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음을 이 동네가 변한 모습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을 때에는 낡은 캐리어 하나가 손에 쥐어져 있었고, 대학이 결정된 후 서울은 춥다시며 부모님께서 사주신 카키색과 황토색 사이 어딘가의 두터운 무스탕 자켓에 밝은 갈색의 가는 골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멋을 부려보겠답시고 짧은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까지 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센스였는지. 서울의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르는 채 한양대 지하철 역에 내려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한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서울이 생각보다 인정 없는 곳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며 기숙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남자는 종교를 전도하려는 목적이 있긴 했지만 지하철 역에서 기숙사까지는 근 이십분은 걸어야 했으므로 참 친절한 사람이었구나 싶다. 

 

낡아보이는 기숙사에 들어서서 입사 과정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처음 열었던 기숙사의 방은 내가 태어나서 본 가장 작은 방이었다.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코 끝에 뭉근하게 들러붙었고, 푹 꺼진 침대 매트리스에는 이런 저런 얼룩이 실내가 어두침침한 와중에도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더 보기 싫은 방을 빠져나와 주변에 어떤 시설이 있나 돌아보러 나왔다. 오분도 채 걷지 않아 눈에 들어온 광경은 내가 생각해왔던 서울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동네로 진입하는 삼거리에 세워진 큰 바위에는 ‘사근동’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이 동네 이름 마저도 당황스러웠던 사근동과의 첫 만남이었다.

 

대학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쓰러질 듯한 미색의 건물들에 걸려있는 간판들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의 세트장 같았고, 건물 앞에 걸터 앉아있는 어르신들의 평균 연령은 거진 일흔을 훌쩍 넘어 보였다. 내 또래의 학생들은 어쩐 일인지 눈에 띄지 않았고 간혹 색 바랜 옷을 입은 꼬마들이 인근 초등학교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에서 둘 셋씩 뭉쳐 다니곤 했다. 그러니까 이 곳은 광안대교가 준공 들어가기도 전의 광안국민학교 — 내가 여덟살 때 잠깐 다녔던, 그러니까 22년 전 — 앞 같았다. 바다로 쭉 이어지는 평평한 길 대신 버스가 한참은 굉음을 내야 오를 수 있는 언덕베기가 있다는 점만 빼면 동네가 풍기는 분위기는 똑같았다. 새로운 나의 삶의 터전은 그렇게 내 유년시절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며 적잖은 실망감을 주었다.

 

십년이라는 시간동안 사근동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위험했던 사근고갯길은 이제 밝은 가로등이 규칙적으로 심어져 있고, 비포장 길이나 다름 없던 고갯길은 몇 번의 대공사 끝에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도포되었다. 제대로 된 편의점 하나 없던 이 곳에 지금은 편의점은 물론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도 두 곳이나 생겼다. 등교를 위해 스쳐지나갔던 학생들이 그 카페를 방문하기 위해 이 동네를 찾아오기까지 했고, 인근에 거주하던 학생들도 왕십리까지 굳이 나갈 필요 없이 이 곳에서 만남을 가진다. 덕분에 사근동을 오가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시원찮은 것 같지만 칵테일을 파는 바도 생겼다. 대학교의 교환학생이나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숙소도 생기면서 보이기 시작한 이국적인 얼굴들은 이런 사근동의 변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다.

 

물론 사근동을 대하는 내 마음 역시 많이 변했다. 이는 달라진 동네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동네에 익숙해지고 편해지기 시작하면서 미처 몰랐던 장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십리까지 한 번에 — 지금은 압구정 까지도 — 갈 수 있는 버스도 있고, 지하철 2호선과 1호선을 이어주는 지하철 노선도 걸어서 오분 거리에 있다. 365일 할인을 한다는 동네 슈퍼와 물건의 종류는 적지만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도 있었고 약의 유통기한이 의심되긴 하지만 나름 약국도 있다. 동네의 대부분이 주택이다 보니 소란스럽지 않아서 — 공사할 때를 제외하면 — 아무런 방해없이 푹 쉴 수 있다. 학교가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거주하는 사람들도 정겨워졌다. 격주로 일요일에는 인근 어르신들께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무더운 날씨에 ATM 건물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수다를 떨고 계시는 할머니들을 처음 봤을 때에는 한참을 웃었다. 어떤 집 담벼락에는 누군가가 여름 내내 몰래 수박 껍질을 버렸는지 화가 잔뜩 난 주인 아주머니의 분노에 찬 경고장이 거칠게 찢겨진 피자 박스에 쓰여 있었다. “여기다 수박 껍질 버린 놈 설사나 해라.”

 

이 곳에는 서울 살이를 하며 느낄 수 없었던 사람 사는 내음이 가득했다. 이제는 고향보다 더 고향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내가 혼자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이 곳인 것이다. 얼른 졸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곳 역시 서둘러 떠나야 할 곳이 되긴 했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만큼 정을 붙이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데이트하러 나가던 길 무심코 누른 셔터에 담긴 사근동의 모습을 보고 상념에 잠겼다가 두서없이 써내려 본다.



한 친구와 대화하던 중 공격적인 말투로 의견을 펼치는 녀석 덕분에 나까지 대답을 공격적으로 했다. 평소 내 말투가 온화하다고 하시며 기술적 카리스마가 있으려면 공격적으로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교수님께서 조언을 해주셨지만, 내가 청자가 되어보니 불필요하게 반감만 생길 뿐 그로 인해 내가 상대방의 의견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상대방에게 의견을 제시하거나 반박을 할 때에는 공격적인 말투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그런 언사를 받아들일 때에는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상대방이 왜 그렇게 공격성을 띤 어조로 이야기하는지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겠다.



언제고부터 이를 가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밤 가는 것은 아니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거나 피곤한 날 이따금씩 그러는 모양이다.

얼마 전 이가 썩어 치과에 들렀다. 썩은 부위가 넓어 결국 신경치료까지 진행하고 크라운 치료를 받았는데, 새로운 이를 해넣은 첫날 밤 잠이 들었다가 돌을 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원인은 새로운 이의 안쪽이 다른 이 보다 살짝 높아 이를 갈 때 아랫니에 걸려 이물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손으로는 거의 차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혀로는 엄청난 단차를 느꼈다. 이를 점검하러 치과에 들렀을 때 의사 선생님께 이런 상황을 모두 이야기 해드렸더니 이 높이를 조정해 주시고는 의외의 팁을 하나 알려주셨다.

잘 때 이를 가는 이유는  바로 일과 시간 동안 턱 근육이 계속 긴장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은 자기 전 턱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손가락 두 세 개를 이용하여 턱 근육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거나 타월을 따뜻하게 적셔서 가볍게 찜질을 해주면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셨다. 세상에 도대체 낮 동안 얼마맡큼의 스트레스를 받기에 근육이 그렇게까지 경직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가는 소리에 잠이 깰 정도로 갈아댔던 날도 기억이 난다. 요며칠의 스트레스 원인은 학기 평가를 앞둔 채 맞이하는 연구실 세미나 준비였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전달 역시 중요한 세미나는 한 학기에 한 번 정도로 순서가 돌아오니만큼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조금 많이 예민해졌었던 모양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 아닐까. 퇴근을 적당히 일찍 한 후, 그리고 주말을 이용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시간을 갖는 것은 단순히 일의 능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너무 고차원 적이다. 휴식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 그자체를 위한 것이다. 명심할 점은 최선을 다 했을 때에만 진정한 휴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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